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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억 메커니즘의 비밀, 뇌는 어떻게 학습할까?

기억 메커니즘의 비밀

뇌는 어떻게 학습할까?


글. 한국뇌연구원 인지과학연구그룹 김구태 박사

출처. 분당서울대학교병원 건강문화매거진 <나음플러스>


곧 쌍둥이의 아버지가 될 예정이다. 출산이 한 달 정도밖에 남지 않아 육아용품들을 챙기고, 새삼 아이들의 심리 발달에 대해 복습하느라 정신이 없다. 성장할 아이들의 모습을 떠올리면 저절로 웃음이 나지만, 교육에 대해 생각하면 여느 부모와 마찬가지로 고민스럽다. 학습과 기억의 원리에 대한 뇌과학을 오랫동안 연구해온 연구자로서 뇌의 기억과 학습의 원리, 그리고 학습과 뇌 건강에 관해 이야기를 풀어보고 싶다.


‘학습의 원리’를 알아야 하는 이유

필자는 아이들이 ‘창의적이고 지적인 성인’으로 성장하길 바란다. 치킨을 먹으면서 공룡과 진화의 원리를 떠올릴 수 있기를, 인공지능의 수학적 원리를 이해하고 감탄할 수 있는 사람이 되길 원한다. 인류가 남긴 문화와 지적인 유산을 깊이 이해하고, 경외하고 사랑할 수 있는 사람이 되길 바란다.
하지만 현실적으로 학교 공부에 대해 고민하지 않을 수 없다. 자발성과 거리가 멀고 경쟁의 요소를 배제하기 어려운 학교 공부와 자발적이고 즐거운 학습 사이의 타협점은 일견 찾기 힘들어 보인다. 그러나 학교 공부의 본질과 우리 두뇌에서 일어나는 학습의 원리를 자세히 살피면 둘 사이의 거리가 생각만큼 크지 않음을 알 수 있다.
알다시피 ‘대학수학능력시험’은 아이들이 대학에서 주도적인 학문 활동을 하기 위한 학습 능력 기반을 평가하는 시험이다. 얼마나 넓고 잘 조직화된 개념적 지식망을 가졌는지, 개념적 지식을 얼마나 유연하고 효율적으로 사용할 수 있는지를 평가하는 것이다. 학습 이론을 전공한 입장에서 볼 때, 많은 것을 암기하고 열심히 문제를 푼다고 해서 그물처럼 촘촘한 개념적 지식이 길러지고, 개념적 지식의 활용 능력을 향상하는 것은 아니라고 본다. 효과적인 학습을 위해서는 우리 두뇌가 정보를 처리하고 저장하는 방식을 이해할 필요가 있다.


공부하는 어린이

두 종류의 기억 시스템

우리의 외현적(declarative) 학습 시스템은 크게 해마(hippocampus)라는 뇌 영역을 중심으로 하는 ‘일화 기억 시스템(episodic memory system)’과 신피질(neocortex)을 중심으로 하는 ‘의미 기억 시스템(semantic memory system)’으로 구분된다. 컴퓨터가 주 기억장치와 보조 기억장치를 따로 보유한 것과 유사하게, 이들 기억 시스템은 서로 다른 종류의 정보를 기억하며 기억의 방식도 매우 다르다.
일단 해마 중심의 일화 기억 시스템은 한 사람이 경험한 사건을 마치 폴라로이드 사진기처럼 아주 빠르게 저장한다. 예를 들어, A라는 사람이 교차로에서 신호등을 기다리고 있는데 오토바이가 신호를 무시하고 달려가는 일을 겪었다고 가정하자. 이런 일화적인 사건은 해마에 바로 기억되어, 다음날 같은 교차로에서 혹시 오토바이가 달려오지는 않는지 주의할 수 있게 한다. 일화 기억은 빠르게 저장된다는 점에선 효율적이지만, 간섭(interference)에 의해 쉽게 지워지는 한계가 있다. 매일 같은 교차로를 지나면, 오토바이 사건은 매일 겪는 비슷한 경험에 밀려 쉽게 잊히게 된다.
교차로에는 여러 대의 신호등이 있는데, 이 사이엔 ‘규칙’이 있다. 한 신호등의 빨간 등이 꺼지면, 다음 신호등의 파란 등이 켜지고, 또 그다음 신호등의 빨간 등이 켜지는 방식이다. A가 출근길에 매일같은 교차로를 지난다고 가정하면, A는 이 규칙을 서서히 무의식적으로(implicitly) 익히게 된다. 그래서 저편 신호등의 빨간 등이 꺼지는 순간, 저도 모르게 엑셀에 발을 올리고 출발할 준비를 하게 된다. 이러한 종류의 기억, 즉 반복되는 경험들 사이에 존재하는 복잡한 통계적 규칙에 대한 기억을 의미적 기억(semantic memory), 스키마(schema)라고 한다. 그리고 이것이 ‘개념적 지식’의 본질이다.
우리가 처음 회사에 입사하면 ‘일머리’가 없어 허둥지둥 쫓기게 된다. 오랫동안 비슷한 프로젝트들을 처리하다 보면 드디어 ‘일에 대한 큰 그림’을 머리에 그리게 된다. 새로운 프로젝트가 맡겨져도, 일하는 방식이 머리에 착착 정리되고 자신 있게 일을 진행할 수 있게 된다. 일머리, 일에 대한 큰 그림이 모두 일에 대한 스키마, 혹은 개념적 지식을 의미하는 용어들이다.


일화기억 의미기억 다이어그램
일화 기억 : 개인의 자전적 사건(언제, 어디서, 무엇을 경험했는지)에 대한 기억 경험한 사건이 빠르게 저장되지만 쉽게 지워지는 한계 기억의 공고화 : 경험 중에 규칙적인 부분이 선택적으로 신피질로 전환 의미 기억 : 일반적 사실에 대한 기억. 추출되는 과정이 길지만 안정적이여서 쉽게 지워지지 않음 세상에 대한 일반적인 지식 : 스키마(schema) 반복되는 경험에 존재하는 복합통계적 규칙에 대한 기억으로 매우 구조적이고 위계적인 질서를 갖게 되어 유연하고 창조적으로 사용될 수 있음.

기억 공고화와 개념적 지식

그렇다면 이렇게 중요한 개념적 지식은 어떻게 형성되는 걸까? 다시 교차로의 예로 돌아가 보자. 교차로에서 겪은 매일 매일의 기억은 해마에 사진첩 사진들처럼 일단 저장된다. 그리고 자는 동안 규칙적인 부분(예: 신호등의 규칙)이 선택적으로 신피질로 옮겨져 저장된다. 이렇게 우리의 경험 중 규칙적인 부분이 선택적으로 신피질로 전환되는 과정을 ‘기억의 공고화(memory consolidation)’라고 한다.
신피질에 저장된 개념적 지식은 해마에 저장된 일화 기억과 질적으로 다른 특성을 갖는다. 개념적 지식은 일화 기억과 달리 추출되는 과정에서 매우 긴 시간이 필요하지만, 안정적이라서 쉽게 지워지지 않는다. 또 기억이 매우 구조적이고 위계적인 질서를 갖게 되어 유연하고 창조적으로 사용될 수 있다.
요리 초보들은 요리에 대한 개념적 지식이 부족해 레시피에 의존할 수밖에 없다. 그래서 레시피에 있는 사소한 재료 하나만 없어도 포기하려 한다. 반면 오랜 요리 경험이 있는, 예를 들어 백종원 선생 같은 분들은 신피질에 요리 전반에 대한 잘 짜인 개념적 지식을 저장하고 있다. 따라서 레시피에 적힌 파슬리가 없으면 참나물로 대신하는 등 새로운 조합 방법을 쉽게 찾아낸다.
이런 개념적 지식의 특성, 즉 유연성과 창조성은 고등 교육에서 필수적으로 요구되는 것이다. 이 때문에 대학은 이런 능력을 갖춘 학생을 선발하기 위해 많은 노력을 기울이고 있다. 또한 산업 구조가 고도화될수록 기업에서도 이런 능력을 갖춘 소수의 창조적 인재들을 원하게 된다.


적극적 탐구의 중요성

최근 학습 분야 뇌과학 연구들은 적극적인 ‘아웃풋(output) 중심’의 학습이 개념적 지식의 형성 속도를 급가속할 수 있음을 증명하고 있다. 일반적으로 학교나 학원에서는 선생님이 개념을 설명하고 문제를 풀고, 학생들은 강의 내용을 필기하며 개념의 정의나 문제 푸는 방법을 익힌다. 강의 내용을 이해하는 것, 즉 인풋(input)을 주된 목표로 한다. 반면 아웃풋 중심의 학습은 단순한 지식의 이해가 아니라 적극적인 탐구를 목표로 한다. 적극적인 탐구 활동으로 개념적 지식이 활성화되며, 새로운 지식이 해마를 거치지 않고 활성화된 기존의 개념적 지식망에 직접적으로 동화(assimilation)된다. 기존의 개념적 지식이 새로운 지식에 의해 끊임없이 업데이트되고 지식망이 체계화·정교화되는 것이다. 이 과정에서 ‘개념적 지식-새로운 지식의 이해’ 사이클이 동시에 작용하며, 이 결과로 개념적 지식의 네트워크가 놀랍도록 효율적으로 발전하게 된다. 그리고 이렇게 형성된 개념적 지식망은 높은 안정성과 유연성을 갖는다. 이것은 현대 사회에서 요구하는 고차원적 사고력, 창의력의 생물학적·뇌과학적 기반이다.
구체적으로 어떻게 하면 아웃풋 중심의 학습을 할 수 있을까? 일반적으로는 ‘다양한 독서와 탐구적 글쓰기’가 쉽게 시도해 볼 수 있는 방법일 것이다.
예를 들어 아이가 공룡에 관심이 많다면, 공룡에 대한 다양한 독서를 할 수 있도록 도와주고, 독서를 통해 얻은 지식을 탐구적 글쓰기를 통해 적극적으로 적용하도록 지도할 수 있다. 공룡의 정의와 진화 과정, 현대 조류와 공룡의 진화적 관계, 진화의 개념, 진화의 수학적 원리, 이 수학적 원리를 코딩으로 구현할 방법, 진화론이 제기된 시기 영국의 사회·문화적 분위기 등 탐구적 글쓰기를 통해 개념적 지식을 폭발적으로 확장하고, 정교화하는 것이 가능하다. 그물처럼 촘촘하게 발달한 개념적 지식을 만드는 과정, 즉 다양한 경험과 독서, 적극적인 탐구는 공부의 본질이 무엇인지, 그것이 얼마나 지속적인 즐거움을 주는 활동인지도 알 수 있게 한다.


뇌 이미지

적극적 탐구와 뇌 건강

뇌 역시 생체 기관 중 하나지만, 여타 기관과 달리 뇌는 고도의 계산과 정보처리라는 특수한 기능을 수행한다. 따라서 뇌 건강이라는 이슈에는 ‘생물학적 건강’과 더불어 ‘기능적 건강’ 측면이 고려돼야 한다. 다른 기관과 마찬가지로 뇌의 생물학적 건강은 적절한 영양과 운동, 수면에 의해 유지될 수 있다. 그리고 기능적 건강 유지를 위해선 평생에 걸친 적극적인 학습이 필수적이다.
우리나라 45세 이상 성인의 문해력 수준은 OECD 평균을 크게 밑돌고, 이는 우리 사회에서 입시 이후의 자발적인 학습이 매우 빈약함을, 그리고 결과적으로 성인들의 빈약한 ‘기능적 뇌 건강’을 방증한다. 수많은 이유가 있겠지만, 개인적으로는 암기와 문제풀이 중심의 교육 방식이 이러한 기능적 뇌 건강의 부실에 가장 큰 요인인 듯하다.
우리는 학교 공부를 통해 많은 것을 머릿속에 집어넣지만, 정작 이것들을 적극적으로 활용하는 방법을 배운 적이 없다. 입시가 끝나면 누구도 괴로운 공부를 다시 하고 싶어 하지 않는다. 결과적으로 새로운 지식을 자발적으로 습득하는 능력이 심각하게 저하된다. 쌩쌩하게 작동하는 건강한 뇌를 위해서라도 적극적 탐구 중심의 학습이 중요하다. 이 가을, 다양한 독서와 탐구적 글쓰기를 시작해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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