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뜨거운 여름 날씨에 꺾인 진시황의 꿈
분당서울대학교병원 뜨거운 여름 날씨에 꺾인 진시황의 꿈 글 이한 역사칼럼니스트 인터뷰 응급의학과 김솔아 교수 메인 이미지

위대한 지배자 진시황, 그 마지막을 장식한 온량거

글. 이한 역사칼럼니스트

지금으로부터 2천 년 전, 참으로 위대하면서도 놀랍도록 잔인한 지배자가 있었다. 지금 우리가 알고 있는 중국을 만들어낸 사람, 춘추전국시대의 혼란기를 끝내고 통일된 제국을 만들어낸 최초의 황제. 문자와 도량형을 통일하고, 만리장성을 쌓고 분서갱유로 사람들을 괴롭혔으며 마침내 웅장한 지하궁전과 병마용갱을 남겼던, 바로 진시황제이다.

혼란한 시대, 스스로 황제가 된 남자

혼란한 시대, 스스로 황제가 된 남자

진시황(秦始皇)이 이제 그의 이름이 되었지만, 실제 본명은 영정(嬴政)이다. 그의 일생은 태어나는 순간부터 참으로 굴곡이 많았다. 진시황이 태어난 시기는 기원전 254년. 당시 중국은 춘추전국시대라는 혼란기로 각지의 제후들이 일어나 스스로 왕이라 칭하며 다툼과 모략이 끊이지 않던 시기였다.
진시황의 아버지 장양왕은 진(秦)나라의 왕자로 태어났지만, 그다지 사랑받지 못해 조(趙)나라에 인질로 보내진 천덕꾸러기 신세였다. 그러다 큰 부자이던 여불위의 집중적인 후원을 받으며 인생 역전, 진나라의 태자가 된다. 그러면서 여불위의 첩 조희를 아내로 들였는데 그녀가 낳은 아이가 영정, 훗날의 진시황이었다.


만리장성

아버지가 왕이 된 지 3일 만에 세상을 떠난 탓에, 진시황은 13세의 어린 나이로 진나라의 왕이 되었다. 하지만 그의 ‘진짜’ 아빠가 누구냐는 수군거림이 끊이지 않았다. 중국의 역사서 《사기》 ‘진시황본기’에는 진시황이 장양왕의 아들이라고 적혀 있다. 그런데 ‘열전’에서는 조희가 임신 중인 채로 장양왕의 아내가 되었고, 12개월 만에 아이를 낳았다고 한다. 그것이 과연 의학적으로 가능한지에 관한 논의는 뒤로 미뤄두자. 어쨌든 진시황이 여불위의 자식이라는 소문이 동네방네 퍼져 있었다는 것이 중요하다.
여기에 더해 조희는 남편이 죽은 뒤 애인을 두었는데, 그 애인은 반란까지 일으켰다. 진시황은 어머니는 귀양 보내고 어머니의 애인은 죽였으며, 어쩌면 친아버지였을 지도 모르는 여불위를 자결하게 했다. 이처럼 불륜과 패륜이 콩가루처럼 흩날리는 집안 사정은 진시황의 성격 형성에 절대로 좋은 영향을 주지 않았다.
진시황은 잔인한 지배자였지만, 훌륭한 지도자이기도 했다. 유능하다면 신분과 출신을 가리지 않고 등용했고 그들의 조언을 기꺼이 받아들였다. 본인도 ‘늦게 자고 일찍 일어나는’ 일벌레였다. 그리하여 최고의 아웃풋을 뽑아내었으니, 진나라는 천하를 통일하게 된다. 기원전 230년 처음으로 한(韓)나라가 멸망했고, 차례차례 다른 나라들을 정벌한 끝에 기원전 221년 제(齊)나라의 멸망과 함께 춘추전국시대가 막을 내린다. 이것만으로도 엄청난 업적이었지만, 그는 만족하지 않았다.
그때까지 진왕이었던 진시황은 직접 ‘시황제’라는 이름을 지었다. 처음(始)의 황제, ‘더 퍼스트 엠퍼러(the first emperor)’였다. 처음 이후로는 2, 3이라는 숫자가 무한히 이어지는 법. 그렇게 자신이 만들어낸 세계가 영원할 것이라고 공언했다.
그리고 잘 알려진 대로 지금의 중국을 만들어냈다. 오랜 춘추전국시대를 거쳐 나라 별로 달라져 있던 글자체를 진나라의 예서체로 통일하고 지역별로 달랐던 화폐도 진나라의 반량전으로 통일했다. 도량형과 수레의 너비도 동일한 기준을 적용시켰다. 오래도록 쪼개져 있었던 나라들이 하나가 되기 위해서는 반드시 필요한 일이었다. 매우 많은 진통과 괴로움이 있었지만 그럼에도 이 모든 일을 시행해냈다.
하지만 그것만으로 부족했던 진시황은 자기 자신의 불로불사마저 꿈꿨다. 어떻게 하면 죽지 않을 수 있을까. 진시황은 영원히 산다는 신선을 찾고 불로불사를 이룰 수 있다는 선약을 찾았다. 그래서 서복(혹은 서불)과 어린 소년소녀 수천 명을 보내어 불로초를 찾아오게 했고, 여러 방사를 모아들였다. 그렇지만 모두 알고 있듯, 결국 불사신의 비법 따위는 없었다. 그래도 쉽게 포기하기 어려웠던 그는 기원전 210년 다섯 번째 순행을 떠난다.


불로불사의 꿈, 뜨거운 여름 날씨에 꺾이다

불로불사의 꿈, 뜨거운 여름 날씨에 꺾이다.

천하를 통일한 자신의 업적을 자랑하고, 더불어 신선과 불사의 비법을 찾기 위해 수많은 신하를 거느리고 떠난 9개월간의 긴 여행이었다. 초(楚)나라 땅 운몽에도 가보고, 높은 산에 올라가기도 했으며 동쪽 끝 성산대를 찾고, 자신의 업적을 새겨둔 비석도 세웠다. 자신이 얼마나 위대한 일을 해냈는지, 그리하여 세상이 얼마나 윤택해지고 백성들이 편안해졌는지 자랑했다.
그렇지만 이 여행길은 자랑할 만큼 편안하진 못했다. 우선 진나라가 전국으로 통하는 도로를 만들었다고는 하지만, 매끄럽고 흔들림이 덜한 지금의 아스팔트 도로에 비할 바는 아니었다. 그리고 무엇보다, 자신의 업적을 길이길이 남기고 불로불사를 위해 떠난 여행은 아이러니하게도 생의 마지막으로 이어졌다.
순행을 떠난 시황제는 말을 타는 대신 수레를 탔을 것이다. 마침 진시황릉에서 당대의 수레 모형이 온전한 형태로 발굴돼 시황제가 탔던 수레 모양을 짐작하게 한다. 신분이 높은 사람이 타는 ‘온량거(轀輬車)’는 수레 위에 커다란 가마를 올린 형태로 여닫을 수 있는 창문이 달려 있다. 하지만 창문이 몹시 작기 때문에 추울 때는 보온에 도움이 되지만, 더운 날씨에는 취약했다.



온량거

시황제의 수레가 일반적인 나무 재질이 아닌 튼튼한 청동으로 만들어졌으리란 추측도 있다. 천하에는 시황제를 죽이고 싶어 할 정도로 미워하는 이들이 너무나 많았기 때문이다. 천하를 통일하기 위한 전쟁으로 많은 나라가 멸망했고 그만큼 많은 사람이 다치고 죽은 탓이다. 당연히 시황제를 향한 암살시도도 여러 번 이어졌다.
연(燕)나라 태자 단이 자객 형가를 보냈고, 장량이 철퇴를 던져 수레를 습격하기도 했다. 게다가 진나라의 국색(國色)은 검은색이었다. 진나라가 물의 기운을 가진 나라라는 이유에서였다. 그래서 병마용갱에서 발굴된 병사들의 옷도 원래 검은색으로 칠해져 있었다고 한다.
그럼 이제 생각해보자! 청동으로 만들어지고, 온통 검은색으로 칠해져 있는 황제의 위풍당당한 수레. 그 안에 탄 진시황은 황제다운 화려한 옷을 입고 있었을 것이다. 그것도 검은색의. 잘 알려져 있다시피 검은색은 열을 잘 흡수하는 색깔이다. 그리고 순행이 길어지면서 마침내 여름이 되었다. 그의 수레 안이 얼마나 찜통이었을지 상상하기는 어렵지 않다. 그리고 마침내 그 열은 진시황의 건강을 심각하게 위협했다. 우리에게도 익숙한 ‘열사병’이라는 이름으로 나이도 있고, 오랜 여행으로 인한 여독이 쌓인 상태에서 진시황의 몸이 버텨낼 리가 없었다.
마침내 산둥성의 평원진에 이르러 그는 병에 걸렸다. 흔히 온열 질환을 ‘더위 먹었다’는 귀여운 말로 표현하지만, 열사병은 마침내 죽음에 이를수도 있는 심각한 질환이다. 하지만 그 누구도 황제에게 ‘당신은 죽어가고 있다’고 말할 수 없었다.
죽어가는 황제의 순행 행렬은 지금의 허베이성사구 평대에 이르렀다. 진시황은 자신이 죽어간다는 사실을 힘겹게 인정했고, 큰아들 부소와 장군 몽염에게 수도로 돌아와 자신의 장례를 치르라는 유조를 내렸다. 그다음 마침내 세상을 떠났다. 하지만 이 모든 조치는 너무 늦은 뒤였다. 시황제의 곁에 있던 환관 조고는 권력을 오롯이 독점하려 했고, 자신에게 유리한 상황이 될 때까지 황제의 죽음을 숨겼다.
그래서 진시황은 죽었지만 죽지 않은 상태가 되어버렸다. 조고는 황제가 죽었다는 사실을 비밀에 부치고 시체를 온량거에 숨겨두었는데, 더운 여름이었기에 시체는 금방 썩어 고약한 냄새가 났다. 그러자 소금에 절인 생선 한 수레를 일부러 싣고 다니면서 그 썩는 냄새가 나게 했다. 황제의 마차는 그대로 관으로 변했고, 이 일 덕분에 오늘날 ‘온량거’는 시체를 싣고 다니는 상여와 동의어가 됐다.


만리장성

이후의 역사는 우리 모두에게 잘 알려져 있다. 조고는 황제의 명령서를 꾸며내 현명한 태자 부소와 용감한 장군 몽염을 자결하게 하고, 어리석은 황자 호해를 제2 황제로 세웠다. 진시황의 장례는 그 후에 치러졌다. 그렇게 진시황은 중국을 통일한지 불과 11년 만에 서거하고, 그가 세운 중국 최초의 통일 제국은 그의 사후 5년 뒤 결국 멸망하고 만다.
역사에 만약이란 없지만, 만약 진시황이 순행을 떠나지 않았더라면 조금 더 오래 살았을까? 그랬다면 진나라의 역사는 달라졌을까? 질문의 답은 누구도 해줄 수 없겠지만, 최소한 무더운 여름 온열 질환에 유의하라는 당부는 전할 수 있을 것 같다.


미니인터뷰 - 응급의학과 김솔아 교수

응급의학과 김솔아 교수
진시황은 청동으로 만든 가마를 타고 장기간 순행을 다니다, 무더운 한여름 ‘열사병’을 얻은 것으로 추정됩니다. 당시 진시황에겐 어떤 증상들이 나타났을까요?

높은 온도에 오랫동안 노출돼 열사병에 걸리면 머리가 아프고 어지러우면서 속이 울렁거리고 구토를 하게 됩니다. 또 온몸이 피로하고 기운이 없지요. 진시황 역시 이와 같은 증상을 호소했을 겁니다. 심한 경우 환각과 초조함, 떨림이 나타나는 섬망(delirium) 증상을 겪었을 수도 있습니다. 혼란이 와서 이치에 맞지 않는 말을 하거나 이상한 지시를 내렸을 수도 있고, 더 위중했다면 팔다리에 마비가 오거나 발작을 하거나 혼수상태에 빠졌을 수도 있습니다.


열사병에 걸린 진시황 곁에, 교수님께서 주치의로 함께 계셨다면 어떤 응급조치를 하셨을까요?

제가 주치의였다면 제일 먼저 청동 가마에서 내리게 한 뒤 체온을 낮추기 위해 최선을 다했을 겁니다. 두꺼운 옷을 벗겨내고, 시원한 물을 뿌린 뒤 계속 부채질을 했겠지요. 이렇게 하면 물이 증발하면서 더 빨리 몸의 열을 식힐 수 있습니다. 시원한 물을 마시게 해서 체온을 낮추고 땀으로 잃어버린 수분도 보충하게 했을 겁니다. 얼음팩을 목이나 겨드랑이, 사타구니에 대는 것도 좋은 방법인데, 진시황이 살던 시대에 얼음을 구할 수 있었을지는 모르겠네요.


열사병이 아닌지 의심될 때, 어떻게 대처해야 하는지 조언의 말씀을 부탁드립니다.

열사병이 의심되면 무엇보다 열을 피하고 체온을 낮추는 것이 중요합니다. 온도가 높은 곳에 있다면 시원한 장소로 옮기고, 햇볕이 내리쬐는 곳이라면 햇볕을 피할 수 있는 그늘로 이동해야 합니다. 그 뒤 옷을 벗거나 부채질을 하는 등 적극적으로 체온을 낮춰야 해요. 시원한 물을 마시는 것도 도움이 되는데 의식이 없는 사람에게는 절대로 억지로 물을 마시게 하면 안 됩니다. 가벼운상태가 아니라면 꼭 병원을 방문해 정확한 진단과 치료를 받으셔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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